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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사오이(唐紹儀)와 갑신정변

点击:次 添加日期:2015-02-05 12:00:27 来源:중한인력-취편부 编者:조은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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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力 韩国企业招聘 文版新闻얼마 전 중국의 지인이 탕사오이의 서울 행적을 알고 싶다고 하여 조계사 근처의 옛 우정총국 건물로 안내한 적이 있다. 탕사오이(1860-1938)는 청말 민국초의 외교가이며 정치인으로 16년간의 서울 생활을 통하여 한국과는 인연이 깊다.

   우정총국(Centeral Post Office)은 미국을 다녀 온 홍영식이 건의하여 우리나라 역참을 서양식의 우정 시스템으로 바꾸기 위해 설치한 최초의 우편행정관서다. 병조참판인 홍영식이 총판을 겸직 하였다. 1884124일은 우정총국이 개국하는 날이다. 이 날 축하를 하기 위해 홍영식 김옥균 등은 각국의 외교관과 대신들을 불러 신청사에서 축하연을 개최하였다. 민영익 등 주요대신과 외교 고문 묄렌도르프 미국의 푸트공사 영국의 애스턴 총영사 외에 일본의 외교관도 초청되었다.
   연회가 무르익을 무렵 행사장 인근에서 불길이 솟았다. 불이 난 것을 확인하고자 밖으로 급하게 뛰어 나간 민영익이 칼을 맞고 돌아 와 쓰러진다. 우정총국 개국을 계기로 쿠데타를 준비한 김옥균 등 급진 개화파가 숨겨 둔 행동대원들의 칼에 맞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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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선대원군이 청국에 납치된 후 조선은 쇄국의 빗장을 열고 개화해야 한다는 인식이 대세였다. 그러나 개화파 중에는 청국의 양무운동을 벤치마킹하자는 온건파와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본 따야 한다는 급진파가 대립하고 있었다. 친일 급진파는 민영익 등 민비 척족으로 이루어진 친청 온건파를 개혁의 걸림돌로 보고 있었다
민영익은 명성황후의 먼 친척이지만 10년 전 폭탄테러로 폭사한 명성황후의 양 오라버니 민승호의 대를 이은 양 조카이다. 민영익은 명성황후의 집안의 대를 잇고 있어 척족의 중심인물이다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는 민영익을 도와 준 사람은 독일인 묄렌도르프였다. 그는 민영익을 부축하여 그 곳에서 멀지 않은 자기의 집으로 몸을 피했다. 묄렌도르프의 집은 지금의 조계사 후문의 수송근린공원 근처에 있었다. 물론 당시에는 조계사는 없었다. 고려시대와 달리 조선의 억불정책으로 4대문 안에는 사찰이 없었다. 1910년 한용운 등의 노력으로 4대문 안에 처음 사찰을 세운 것이 조계사의 전신인 각황사였다
   천연기념물로 수령이 수백 년 된 조계사 백송(백피송 또는 백골송)은 중국이 원산지이다. 현재 백송이 있는 곳은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 온 어느 세도가의 안마당이었는지 모른다. 당시 사신을 다녀 온 세도가들은 귀국 길에 중국의 백송을 가지고 와 자기 집에 심었던 것이 유행이었다. 조선에는 없는 귀한 백송으로 집안의 위세를 보여 주고 싶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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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영익을 데리고 간 묄렌도르프의 집은 본래 흥선대원군의 막내처남인 민겸호의 집이었다. 민겸호는 폭사한 민승호의 친동생이며 민영환의 생부로 1882년 임오군란 시 병조판서로 있었다. 급료를 받지 못해 난을 일으킨 구식 군인들이 민겸호를 죽이겠다고 민겸호 집으로 쳐들어갔다. 그러나 민겸호는 피신한 후였다. 난병들은 민겸호를 찾아 내 창덕궁으로 끌고 가 대원군이 보는 가운데 민겸호를 죽였다. 민겸호의 시체는 창덕궁내 개천에 아무렇게나 버려졌으나 한 동안 어느 누구도 거두지 않았다고 한다
   민겸호 집은 불행하게 죽은 집주인 때문이지 사람이 살지 않은 폐가가 되었다. 조선조정은 이 집을 묄렌도르프에게 하사하여 자택 겸 해관관서로 사용하게 하였던 것 같다. 1885년 묄렌도르프가 중국으로 돌아 간 뒤에는 엄 귀비의 소유가 되었는데 엄 귀비는 이 자리에 여성교육을 위해 학교를 설립하였는데 이것이 최초의 숙명여중고였다.
   한편 우정국의 난을 피해 묄렌도르프가 민영익과 함께 돌아오자 집을 지키던 묄렌도르프의 비서인 탕사오이가 맞이하였다. 탕사오이는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고 집안을 단속하였다. 그는 총을 빼들고 민영익을 처단하겠다고 몰려오는 친일 폭도들을 막아냈다. 폭도들이 물러가자 묄렌도르프는 미국인 의사 알렌을 불러 민영익을 치료하게 하여 구사일생의 목숨을 살린다

   우정총국에서 시작된 갑신정변은 위안스카이(袁世凱) 1500명의 청군에 의해 진압되고 3일천하로 끝났다. 일본으로 달아 난 김옥균 서재필의 집은 몰수되어 후에 관립한성고등학교(구 경기고등학교) 부지로 제공된다
위안스카이는 묄렌도르프 집에서 일어난 탕사오이의 용감한 행동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 후 두 사람은 한 평생 허물없는 우정(莫逆之交)을 나누었다고 한다. 당시 위안스카이(25) 민영익(24) 탕사오이(22)는 모두 20대의 청년들이었다. 조선에서 담대한 면모를 보여 준 탕사오이는 신해혁명 후 1912년 대총통 위안스카이 아래에서 국무총리를 지낸 인물이다.

   탕사오이는 광동성 향산 출신으로 차 무역을 하는 아버지를 따라 상하이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12세에 청국 정부에서 시행하는 ‘유미유동(留美幼童)’으로 선발되어 국비로 미국 유학을 떠난다. 탕사오이는 컬럼비아 대학 등 7년간의 미국 유학생활을 끝내고 1881년 귀국 하여 텐진의 수사(水師)양무학당에서 학업을 계속하고 있었다. 리홍장은 묄렌도르프를 조선조정의 외교고문으로 파견하면서 탕사오이를 비서로 수행시켰다
묄렌도르프가 조선조정에 거청친로(拒淸親露)정책을 권유하였다하여 그를 추천한 리홍장의 요구로 해임되어 중국으로 돌아가지만 탕사오이는 서울에 남아 위안스카이의 외교 업무를 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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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갑신정변 10년 후 갑오년 청일전쟁의 발발로 신변의 위협을 느낀 위안스카이는 자신의 업무를 대리할 탕사오이를 남겨 두고 귀국한다. 탕사오이는 원세개의 안전 귀국을 위해 지팡이를 짚는 노인으로 분장시켜 일본군이 쫙 깔린 서울을 떠나 인천에 정박 중인 청국의 군함을 탈 수 있도록 하였다고 한다
1895
년 을미년 시모노세끼(下關)조약으로 조선은 청국과의 조공관계가 대등관계로 바뀌었다. 조선과 청국은 정식 외교관계에 들어가면서 청나라는 탕사오이를 조선주재 초대 총영사로 임명하였다. 탕사오이는 청국의 공식 외교관으로 일본의 대륙낭인에 의한 명성황후의 처참한 시해와 고종의 아관파천 등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 끼인 조선의 현실을 직접 목격하였다.

   탕사오이는 1898 9월 귀국 후에는 위안스카이의 대외관계 비서로서, 리홍장 사후 위안스카이가 직예총독과 북양대신을 맡고 있을 때에는 천진 해관업무를 관장한다. 1904년 영국이 티베트를 공격하였을 때 탕사오이는 인도(印度)에 파견되어 영국과 담판, 중영(中英) 티베트 조약(Convention between Great Britain and China respecting Tibet)을 통하여 영국이 티베트 점령을 포기토록 한다. 
   위안스카이 사후 탕사오이는 군벌 정부의 외교수장으로도 활동하나 장제스(蔣介石)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일본에 이용될 것을 우려한 장제스의 밀정에 의해 상하이 프랑스 조계지의 자택에서 암살된다. 1938년 9월의 일이었다.www.cn-kr.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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